임재춘의 <쓰기의 공식, 프렙!>(반니, 2019)은 '인류 최고의 전달력'을 가졌다는 '프렙 PREP'으로 문장을 전개하고 단문 형식으로 글을 쓰면 훨씬 수월한 글쓰기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책입니다.
저자 임재춘은 책날개와 서문에서 과학기술부 원자력실장을 지낸 핵 전문가이며 기술적 글쓰기 Technical Writing 교육을 받으면서 글쓰기의 중요성을 깨닫고 글쓰기 강사로 활동한 이력을 밝히고 있습니다.
프렙 PREP이란?
인류 최고의 전달력을 가졌다는 '프렙 PREP'은 문장을 P(주제) - R(이유) - E(예) - P(주제 강조)로 전개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여기서 PREP는 Point, Reason, Example, Point의 초성을 딴 두문자어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학파는 논쟁과 토론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변론술을 발전시켰고, 이후 아리스토텔레스가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수사학으로 완성한 것이 프렙 PREP이라는 설명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PERP을 완성했다는 문헌은 본 적 없는데, 프렙이 과연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 등장하는지는 게을러 검증 못했음)
즉, 막연한 주장에 그치는 글이 아닌,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와 예시를 대고 다시한번 자기주장을 강조한 글이 훨씬 설득력이 높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쓰기의 공식, 프렙!>은 수월하게 읽혀지지가 않았고 걸리는 부분도 많아서, 에잇! 프렙 전문가라는 사람이 쓴 글도 이러하니 프렙 따위 집어치우고 말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AI에게 잘 보이려고 글을 쓴다?
저자는 우리가 글을 잘 써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로 번역기를 위해서라는 어이없는 주장을 합니다. 우리가 고생해서 글을 잘 써야 하는 이유가 고작 번역기를 위해서라고? 복문보다 단문을 써야 번역기가 제대로 된 번역을 할 수 있다나요.
번역기가 우리 글을 제대로 번역하지 못한다면, 그 망할 번역기가 문제인거지, 한글이 문제인 거냐고!
두번째로는 프렙 구조로 쓴 글이 AI가 정확하고 빠르게 이해한다고 또 어이없는 주장을 합니다. 젠장, 우리가 글을 잘 쓰는 이유가 사람이 아니고 한낱 번역기나 AI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이런!
마지막으로 저자는 프렙과 단문, 이 두개만 잘 써도 대책 없는 우리나라 글쓰기 문제를 대부분 해결할 수 있으니까 이 책이 인공지능 시대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축복 같은 책이 되길 기대한다며 서문을 마무리했습니다.
글쎄, 저자의 주장이 맞고 안맞고는 잘 모르겠으나, 저자 주장의 타당성은 결국 독자들 각자가 판단하시겠지요.
다만 프렙 PREP을 오래전에 익혔다고 생각했으나 아직도 글쓰기가 이 모양 이 꼴인 걸 보면 개인적으로는 별로 효과가 없는 전략인 걸로.
그렇다고 해서 프렙이 글쓰기에 전혀 쓸데없는 도구라는 말은 아니고, 단지 프렙만으로는 좋은 글쓰기를 할 수 없다는 취지에서 하는 말이에요.
많은 글쓰기 교재들이 강조하는 것처럼 이 책 또한 '단문'을 무슨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고 있는데요. "단문 최고"라는 유행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황량하게 남은 무분별한 단문 오용의 폐해를 또 목격하는 씁쓸함이 드는 책입니다.
물론 <쓰기의 공식, 프렙!>은 단문 이외에도 글쓰기에서 중요한 주어와 서술어와 관계, 수식어와 피수식어의 위치 문제나 알맞은 어휘 사용 등도 피상적으로나마 다루고는 있습니다만.
글쓰기에 왕도가 있을까?
그러나 좋은 글은 글쓰기 교재 몇 권을 읽었다고해서 금방 쓸 수 있는 성질은 아닌 것 같아요. 저자가 곁가지로 인용하고 있는 김훈의 글쓰기 고민이 이를 잘 대변하고 있으니까요. '퇴고'의 고통이 연상대는 일화이기도 합니다.
<칼의 노래> 첫 문장이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이다. 김훈 작가는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라고 써놓고 많은 시간을 고민했다고 방송에서 고백했다.(169쪽)
그래도 이 책을 읽었으니 문장 수집가로서 오늘도 1일 1줍 정신으로 이 책이 인용했던 문장을 인용해 봅니다.
"위대한 연설가가 공통적으로 지킨 원칙이 'KISS'다. 이는 'Keep it Simple, Stupid'를 축약한 것이다."
- 래리 킹의 <대화의 법칙> 중
"말은 간결함을 으뜸으로 친다. Brevity is the soul of wit"
- 셰익스피어
에필로그
혹시 저자가 이 글을 보고 "허허, 이 친구 오독을 해도 너무 심하게 했구먼!"하고 혀를 껄껄 찬다면, 저자의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정보를 자기 식대로 제공하려고 한다. 거기다 종종 자기의 열정과 노고를 마음껏 보여주고 싶어 한다. 가능하면 유식한 것도 자랑하고 싶다. 권위를 내세워 읽는 사람을 주눅 들게도 하고 싶어 진다.(중략)
글은 독자가 읽고 이해해야만 가치가 있다.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그것은 독자의 몫이 아니고 글을 쓰는 사람의 잘못이다."(129-130쪽)
마찬가지로 저의 이 글도 공감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방문객의 몫이 아니고 이 글을 쓴 고스트의 잘못이라는 것을 밝혀둡니다.
글쓰기 역시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왕도가 없는 건 아닐까요? 책을 덮으며 글쓰기에는 그저 "많이 듣고, 많이 읽으며, 많이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는 구양수의 "다문다독다상량"이 최고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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