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구라 기조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2017)는 한 일본인이 바라본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독특한 프레임을 제공합니다. 사변적이고 관념론에 치우친 논쟁은 무익하나, 그럼에도 이 책은 예사롭지 않은 통찰을 남깁니다.
저자 오구라 기조는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8년 동안 철학을 공부하고 교토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는 대표적인 지한파 인사입니다.
이기론으로 본 한국, 한국인
오구라 기조는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에서 조선과 한국을 주자학의 이기론(理氣論)이라는 단 하나의 프리즘에 관통시킵니다. 한국인은 도덕 지향적이고 상승을 열망하는 민족이라는 관점에서 한국인과 한국사회의 다채로운 모습을 조망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도덕은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理)를 뜻합니다. 성리학에서 이(理)란 만물의 본질과 원리를 뜻하고 기(氣)란 물질로서 현상하는 만물을 지칭합니다.
성선설의 입장을 취하는 성리학은 인간은 원래 도덕적으로 완벽한 선의 상태로 태어난다는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순수하거나 조잡한 기(氣)의 흐름에 따라 만물에 천차만별이 생겨난다고 봅니다. 이는 선하게 태어난 사람이 탁한 기에 의해 악당이 될수도 있다는 설명이기도 합니다.
조선의 역사
유교에서는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선한 자, 즉 군자가 다스리는 나라가 이상향이 됩니다. 도덕(理) 지향성 국가인 한국에서는 도덕을 추구하면 권력과 부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된다는 삼위일체 사상을 한국인들이 공유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주자학의 이상에 따라 도덕을 내세워 권력을 잡은 세력은 부와 결합하여 쉽게 부도덕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때 새로운 도덕을 주창하는 세력이 나타나 집권 세력이 얼마나 부도덕한가를 폭로하는 공격이 성공하면 집권층은 전복되고 새로운 세력이 집권 세력이 된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136-137쪽. 내용 발췌)
조선의 역사는 이와 같은 도덕 쟁탈전으로 점철되어 왔다고 오구리 기조는 지적합니다. 조선초 훈구파를 공격한 사림이 그랬고, 이후 네 차례에 걸친 사화가 그랬고, 16세기 당쟁의 시대가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왜 성리학을 신앙이라고해도 좋을 만큼 뿌리 깊이 내재화하면서까지 오늘에 이른 것일까요? 한국인들이 주자학의 이(理)에 열광했던 이유를 오구라 기조는 한반도라는 지정학적인 요인에서 찾습니다.
끊임없이 외세에 시달렸던 한국인들은 균열과 와해의 공포가 강해질수록 통합과 질서를 상징하는 이(理)에 대한 경도가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理)에 집착하는 한국인들과 한국 문화의 특징을 저자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관된 흐름으로 포착해냅니다. 예컨대 이런식입니다.
현대의 한국
일본의 드라마에서는 연인들이 달밤에 공원에서 "왠지 당신 하고는 더 이상 안될 것 같아"라고 헤어진다고 합니다.
반면, 한국의 드라마에서는 "당신은 도덕적으로 잘못됐어. 이렇게 부도덕한 당신과 사귀는 것은 나의 도덕성을 심히 손상시키는 일이야. 그래서 나는 당신과 헤어지지 않을 수 없어"라는 논리로 헤어진다고 합니다.
한국인은 누구나 군자가 되기를 욕망하고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라는 관념을 강렬하게 의식하며 산다고 합니다. '있어야 할 자리'와 지금 '실제로 자신이 있는 자리'와의 거리를 줄이려고 항상 노력하는 것이 한국인의 일생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된 자리에 앉은 적이 없다"고 아내가 남편을 몰아세운다. 그 말에 남편은 견디지 못하고 술을 먹고 난폭해진다.
(···)
원래는 자신이 '저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여러 가지 장애로 '저 자리'에 있을 수 없다. '저 자리'에 앉고 싶다는 동경, 그리고 앉을 수 없다는 고통, 그것이 '한'이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67쪽)
한국이 천재를 배출한 분야들
그리고 저자는 천재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자유자재로움이 그대로 '이'(理)의 궁극적인 미 그 자체가 되는, 자유분방과 질서가 완전히 합일된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이'(理)와 일체화되는 기술이 필요한 분야에서 천재가 많이 태어나는 나라가 한국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저자에 따르면 음악과 바둑, 스포츠 분야가 그렇습니다.
음악계의 정명화, 정경화, 정명훈, 사라 장, 장한나와 바둑의 이창호, 조치훈, 스포츠의 박세리, 박찬호, 선동열, 손기정, 황영조, 많은 신궁들이 그렇다는 겁니다. 이들은 모두 기존 정리(定理)의 아름다운 질서와 완벽하게 합일될 수 있는 재능을 가졌던 천재라는 주장입니다.
이 정해진 규칙으로서의 정리(定理)에서 해방될 때 한국에서는 과학 등의 분야에서도 천재가 출연할 것이라고 오구리 기조는 말합니다.
하나의 철학만을 가진 나라
이러한 관념론적인 해석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한국과 한국인을 바라보는 이러한 외부인의 시각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접해보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단 하나의 철학으로 한 국가의 모든 것을 해석해내는 것은 간명하여 매력적이긴 하나, 그 어떤 나라도 단 하나의 철학만으로 구동될 수 있을만큼 일사분란한 체계를 가지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에서 근대화 식민지론 등 민감한 한일관계 이슈들도 다루고 있으나, 한낱 블로그에서 거론할 성질은 아닌 것 같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직접 책을 통해 저자와 논쟁을 해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