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작품들은 작품보다 작가의 품격에 매료되어 좋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 경우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이 그렇습니다. <여자 없는 남자들> 이후 6년 만에 나온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소설집 <일인칭 단수>도 그런 것 같습니다.
1949년생이니 올해 72세인가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전적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2016)↗에서 밤 9시에 잠자리에 들어 아침 5시에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커피 한 잔을 내려서 하루에 대여섯 시간 동안 원고지 20매를 꼭 쓰는 규칙적인 생활을 수십 년 동안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 대목을 읽는 순간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품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두 해도 아니고 장기간 그렇게 해왔다는 것은 삶을 대하는 경건한 자세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겠기에 저는 그의 이름 앞에 '경이로운'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경이로운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라고 부르곤 합니다.
신작 소설집 <일인칭 단수> 또한 작가의 경이로운 세계관을 담고 있는 소설집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는 음악과 야구, 미스터리한 연애 이야기가 빠질 수 없습니다. 특히, 비틀스 이야기는요.
신작 소설집 <일인칭 단수>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일인칭 단수에 실린 8편의 단편 줄거리를 아주 간략하게나마 소개합니다.
돌베개에
대학교 2학년인 '나'는 레스토랑에서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20대 여자와 우연히 하룻밤을 보내고 그 뒤로 만난 적은 없습니다. 하룻밤을 보낸 그녀는 우편으로 가집(노래 가삿말을 직접 만든 소책자)을 보내주었습니다.
잠자리에서 다른 남자 이름을 부르고 '가끔은 남자한테 안기고 싶어진다'던 그녀,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보험 적용이 안 되는 정신질환이랑 비슷하다고 말했던 그녀에 대한 말과 생각들은 전부 먼지가 되어 사라졌지만 가집만이 살아남아 나를 붙들고 있습니다.
크림
재수하던 시절 '나'는 피아노를 같이 배우러 다녔던 여자에게서 연주회 초대장을 받아가지만 그 장소는 기이한 곳이었고 혼란스러운 생각에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아 숨을 돌리고 있는데 어떤 노인이 내 앞에 나타납니다.
"중심이 여러 개, 아니, 때로는 무수히 있으면서도 둘레를 갖지 않는 원을 자네는 떠올릴 수 있나"(43쪽)
라고 묻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설명이 안 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이 지독히도 흐트러지는 일이 일어날 때마다 나는 언제나 그 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
'나'는 전설적인 재즈 알토색소폰 연주자 찰리 파커(1920. 8. 29-1955. 3. 2)가, 만약 1960년대까지 살아남아서, 보사노바 음악에 흥미를 느끼고 직접 연주까지 했더라면, 하는 가정하에 쓴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라는 비평을 대학교 문예지에 투고합니다.
먼 훗날 나는 뉴욕 이스트 14번지에 있는 작은 중고 레코드 가계에서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라는 타이틀의 레코드를 발견하고 깜짝 놀랍니다.
소설 <일인칭 단수>에 실린 8편 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단편이 아닐까합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직접 감상해 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위드 더 비틀스
비틀스 열풍이 세계를 강타하던 1964년,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어느 날 치맛자락을 펄럭이면서 학교 복도를 혼자 잰걸음으로 걷고 있는 그녀를 발견합니다.
그녀는 '위드 더 비틀스'라는 음반의 LP판을 매우 소중한 듯 가슴에 앉고 있었습니다. 비틀스 멤버 네 명의 얼굴이 반쯤 그림자로 가려진 흑백 사진이 쓰인 재킷이었습니다.
내가 그 소녀를 본 것은 그때뿐이었으나 그 뒤로 몇 명의 여자를 만나고, 가까운 사이가 되기도 했으나 그녀를 보았을 때처럼 조용하게 뛰는 딱딱한 심장, 가쁜 숨, 귓속에서 들려오는 작은 종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혹시 첫사랑의 이런 풍경을 간직하고 계시나요? 이 뒤에 이어지는 여자 친구와의 기이한 연애 이야기도 감칠맛이 있습니다.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
야쿠르트 스왈로스 팬인 '나'의 이야기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그는 어느 날 오후 진구 구장에서 '운명처럼' 소설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고 했습니다.
이 단편은 소설인지 작가의 자서전인지 착각이 들 정도로 교묘하게 서술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일테면 이런 식입니다.
"혹시라도 지금 역사 연표 같은 것을 갖고 있다면 구석에 작은 글씨로 이렇게 덧붙여 주시기 바란다. '1968년, 무라카미 하루키가 산케이 아톰스의 팬이 되다'라고."(129쪽)
사육제(Carnaval)
중년인 '나'는 열 살 연하인 못생긴 여성, F*와 슈만의 '사육제' 연주회가 열리면 어디든 달려가는 사이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F*는 슈만을 이렇게 평했습니다.
"가면을 전혀 쓰지 않고 이 치열한 세상을 살아가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니까. 악령의 가면 밑에는 천사의 민낯이 있고, 천사의 가면 밑에는 악령의 민낯이 있어. 어는 한쪽만 있을 수는 없어. 그게 우리야. 그게 카니발이고. 그리고 슈만은 사람들의 그런 여러 얼굴을 동시에 볼 줄 알았어"(169쪽)
F*와의 기이한 만남은 갑자기 뚝 끊겼고 먼 훗날 그 기억들은 아마도 멀고 긴 통로를 지나, 내가 있는 곳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내 마음을 신기할 정도로 강하게 뒤흔듭니다.
단편 '사육제'를 읽으면 우리 모두에게는 아마 그러한 '기억'들이 있음을 '기억'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소설집 <일인칭 단수>에 실린 단편 중에서 작가적인 상상력이 가장 유치(?)하게 빛나는 작품이랄까요?
'나'는 발길 닿는 대로 혼자 여행하다 군마현 M* 온천의 작은 료칸에서 늙은 원숭이를 만납니다. 그 원숭이는 인간처럼 말도 할 수 있고 브루크너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을 감상할 줄도 아는 원숭이입니다.
그 늙은 원숭이와 말이 통한 나는 로칸의 내 방에서 그 원숭이와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그 원숭이의 인생(?)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이 원숭이는 사람 여자 7명을 연모하고 있다는데...
기상천외한 이 이야기도 독자 여러분께서 직접 무라카미 하루키의 목소리로 듣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좀 킥키 거리게 될 거예요. 특히, 자신의 이름이 한 번씩 생각이 나지 않는 여성분이 계신다면 꼭 읽어보시길 추천드려요.
일인칭 단수
단편 '일인칭 단수'는 아마도 지금 현재의 작가의 심정을 잘 녹여낸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이 단편을 읽으면서 세상과 점점 유리되어가는 작중 '나'에게 연민의 정을 느꼈습니다.
평소 슈트 입을 기회가 거의 없는 '나'는 혼자 슈트와 넥타이까지 매고 혼자 거리를 거니는 한 시간쯤의 무해한 비밀스러운 의식을 가집니다.
어느 날 그런 차림으로 바에서 혼자 술을 마시며 미스터리 소설을 읽고 있는 나에게 어떤 여자가 다가와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고 있으면, 재밌나요?"
이상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소설집 <일인칭 단수>에 실린 단편 8편의 줄거리 소개를 마칩니다. 언제나 그렇듯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은 젠더 감수성이 눈감아주어도 좋을 만큼의 흠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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