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혜영을 읽는 일은 ‘비밀과 어둠과 암호들’로 빽빽한 숲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물음표 열쇠를 손에 꼭 쥔 채. 소설가 정이현이 편혜영의 신작 소설집 <어쩌면 스무 번>(2021)의 책 뒤표지 추천사에 실은 글입니다.
편혜영의 여섯번째 소설집 <어쩌면 스무 번>에는 단편 8편이 실렸습니다. 작가의 말에서 편혜영은 2015년부터 2020년까지 쓰인 단편들 중에 성격이 유사한 여덟 편을 골라 거듭 퇴고 끝에 묶었다고 했습니다.
필요 불가결한 단문들로 이루어진 서사를 쫓아 맨 끝에 다다른 뒤에야 독자는 눈을 껌뻑이며 이내 탄식하게 된다고 소설가 정이현은 말했지만 서사를 쫓아 맨 끝에 다다른 뒤에도 편혜영이 그리고자 했던 세계가 잘 와닿지 않았습니다.
그간 읽었던 소설 가운데 어쩌면 스무 번째로 난해한 소설이 아닐까합니다. 카프카의 소설보다 더 이해하기 어렵고 모호함에 당혹스러웠다고 할까요?
소설가 편혜영
1972년생으로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나와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 석사를 취득하고 명지대학교 문예창작과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2000년 <이슬 털기>로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소설가 편혜영은 몬순(2014)으로 이상문학상, 저녁의 구애(2011)로 동인문학상, 토끼의 묘(2009)로 이효석문학상, 소년이로(2015)로 현대문학상, 호텔 창문(2019)으로 김유정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몬순>은 인도계 미국 작가 줌파 라히리의 <일시적인 문제>를 표절했다는 의혹이 있었습니다. 아이를 잃고 관계가 소원해진 젊은 부부가 태풍(편혜영), 눈보라(줌파 라히리)로 발생한 단전이라는 상황을 관계 회복의 기회로 여긴다는 점 등이 유사합니다.
이를 의식해서인지 편혜영은 단편 '어쩌면 스무 번'에서는 옥수수밭에서 보름달이 떠오르는 광경을 묘사한 부분은 폴 볼스의 소설 <더 셀터링 스카이> 속 문장을 변형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대표작으로는 하드고어 원더랜드라는 평을 들은 소설집 <아오이가든>과 <사육장 쪽으로>, <저녁의 구애> 등이 있습니다.
수록 작품 줄거리
어쩌면 스무 번
표제작으로 실린 첫번째 단편 '어쩌면 스무 번'은 주인공인 나는 아내와 함께 황량한 시골 외딴집으로 이사를 옵니다. 어느 날 보안업체 직원들이 집으로 찾아오면서 나는 안전에 대한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외부로부터 재산과 목숨을 지켜줄 거라고 강권하는 보안업체 직원들, 아무도 모르게 집 안에 모신 치매증세가 심해져 가는 장인, 그 사이에서 나는 알수 없는 공포와 부조리를 경험합니다.
호텔 창문(현대 문학상 수상작)
백부 댁에 얹혀 사는 운오는 사촌 형에게 구박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어느 날 강가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사촌 형의 구조로 살아났지만 사촌 형은 죽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19년이 지났지만 백부와 백모는 늘 그 사실을 상기시키며 윤오에게 인간의 도리를 다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운오는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사촌 형에 대한 감정이 점점 더 모호해지는 걸 느낍니다.
홀리데이 홈
주인공 장소령은 직업군인인 대위 이진수를 소개팅에서 만나 결혼합니다. 이진수는 소령으로 진급했지만 물품 단가를 조작하는 일에 휘말려 군생활을 그만둡니다.
식당을 차린 이진수는 육우를 한우로 속여 팔다 적발되어 손님이 끊기게 되고 아파트는 물론이고 전원주택마저 팔아야 할 지경에 이릅니다.
억수같은 비가 몰아치던 날, 두 남자가 집을 보러 옵니다. 이진수가 소령으로 있을 때 군 생활을 했다는 그 남자는 군 시절 이진수가 꼰대 같았다며 쏘아붙이고 장소령은 자신에게도 무언의 시위가 날아옴을 느낍니다.
리코드
잘못된 투자로 큰 빚을 지게 된 무영은 고등학교때 같은 반이었던 수오의 원룸에 신세를 지고 살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수오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는 일이 발생하고 경찰의 수사도 흐지부지됩니다.
무영과 수오는 고등학교 수련회 때 건물붕괴 사고로 셋 중 한 친구는 죽고 둘만 살아남은 아픔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무영은 수오의 사라짐이 아마도 그 사건과 관계가 있을 거라고 어렴풋이 짐작합니다.
플리즈 콜 미
사업이 실패한 남편이 치매에 걸려 실종되자 미조는 미국에 사는 딸의 집에서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사위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플리즈 콜 미'라는 정체불명의 전화가 걸려옵니다.
그러나 사위와 딸의 반응으로 보아 그 전화는 실제로 걸려오지 않았던 전화 같기도 합니다. 시간과 관계가 모호하게 뒤틀리며 흘러가는 소설입니다.
그 외 단편들
'후견'은 교장 선생의 딸이었던 주인공에게 자신의 딸이라는 아이가 시설에 맡겨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좋은 날이 되었네'는 괜찮게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엄마가 어느 날 누군가에게 상해를 입혔다는 소리를 듣고 고향에 찾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단편입니다.
'미래의 끝'은 어려운 형편에도 대학에 보내기 위해 열 살 난 딸의 학자금 보험에 들던 다부진 엄마의 삶이 무너져 내리는 광경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스무 번 결말
편혜영 신작 소설집 <어쩌면 스무 번>은 모두 불운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내몰린 주인공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작가는 어린 시절 봐왔던 일하는 모든 여자들을 위한 헌사로 '미래의 끝'을 썼다고 했습니다.
소설가 편혜영의 문장들은 어려웠고 이야기의 결말이 말하고자 하는 세계에도 닿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순문학적인 감성이 익숙치 않은 소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첫작품 '어쩌면 스무 번'부터 숨이 막혀오는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문장은 몇번이고 되돌아가 천천히 음미해야했습니다. 그럼에도 모호하고 불명확한 어둠의 숲을 빠져 나오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작가가 소망한 세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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